Frame: 메커니즘과 실존주의적 존재론의 결합체로서의 조각
. 김 정 락 1 미술사학, 김종영 미술관 학예실장

1 메커니즘의 우주관과 인간관

15세기가 저물 무렵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비밀스런 과학노트에 당대의 우주관과 인간관을 집약한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이 작은 스케치에는 한 나신의 남성상이 원과 정사각형 안에 사지를 펼친 두가지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는 르네상스의 총체적인 우주관이나 조형관이 녹아있다고 평가된다. 우선 만물의 척도로서 인간의 형상과 그것의 비례가 가장 이상적 인 기하학적 구조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단순히 철학이나 인간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천체물리학적 차원에서 또한 창조론에 입각한 신학적 차원에까지 소급되는 것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세계질서를 볼 수 있다. 즉 메커니즘이란 기계적 질서 속에서 합리화된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이 사유의 발견은 그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중세의 필사본은 콤파스를 손에 쥐고 세계를 제도하는 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창조주는 우주(혹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메커니즘으로 설계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세계관은 끊임없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지능력의 향상에도 변하지 않고 궁극적인 원리로서 기능하고 있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관념적 정의와 원리적인 성격은 현대미술의 발전에서도 표출되었다. 간단히 서술해 보면 러시아의 구축주의와 바우하우스에서 기하학적 메커니즘은 새로운 이상세계를 구현할 매우 주요한 수단이었고, 같은 세기의 후반부에는 미니멀리즘이나 키네틱 아트에 이르러서도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그 환경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2. 실존주의적 환경으로서 메커니즘

영화 (모던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은 거대한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 쉼 없는 메커니즘의 운동. 즉 포드주의 (Fordism)제로 정의되는 제도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실존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같은 시대에 전체주의적 사회는 인간을 부속으로 삼은 거대한 메커니즘으로서의 국가를 만들었고, 이것은 오늘날 더욱 정교화된 사회구조와 정보체계 속에서 더욱 발전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인간을 이제 "인적자원" 으로 그 위상을 격하시켰고, 거대한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부합되지 않으면 불량품으로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마치 채플린이 영화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채플린이 공장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 도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레오나르도의 인간과 겹쳐지면서 기계문명과 인간의 합리주의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양태로서 다가온다. 이 두 극단은 안수진의 작품 속에서 대치하며 갈등구조를 만들어낸다 이 갈등은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비평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 지평 위에서 관객은 기계문명과 이것을 생산한 인간의 합리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존재론적 정서와 감성에 위배되는지 혹은 어떻게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소외시키는지에 대해 말한다.

3, 구동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영원한 운동

한때 인간은 한 번의 구동으로 영원히 움직일 자동장치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키네틱 아트가 염원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기계는, 예술작품과 더불어, 인간이 꿈꾸었던 다른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였다. 그리스의 신화에 나타난 최초의 예술가이자 기술자인 다이달로스(Daldalos, 이 사람은 인류 최초의 추락사로 기억되는 이카루스의 아버지이다)는 문명의 초기에 과학과 예술이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예술과 기술을 '테크네(techne)' 라는 이름으로 통칭 하였다. 그는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자율적인 기계인간 안드로이드(Android)를 발명해 내기도 하였다

기계의 움직임 속에서 부단하게 작동하는 힘의 역학이나 그것들이 맞물리는 여러 개체들의 시간적인 관계 항은 물리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의심나면 톱니바퀴와 태엽이 있는 시계를 열어보라. 이것은 시간이란 다른 차원의 물리적 운동을 메커니즘으로 해석한 정교한 그림이자 형상이다. 안수진의 작품 (관성의 평균대)은 바로 이러한 형상차를 예술적으로 번안해 놓은 것이다 부단하게 좌우로 진자운동을 하는 메트로놈은 시간을 역학적, 그러니까 메커니즘의 형상으로 번안한 것이고, 작가는 이것을 다시 한 번 수평자 들로 만들어진 구조 위에 올려놓았다 수직과 수폄이 정확히 맞추어진 구조는 인간의 합리주의가 추구하는 합리주의의 선언과 같이 보인다 그 위에 시간은 쉴 새 없이 좌우로 운동한다. 이 끊임없는 움직임은 원형의 톱니가 가진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형태 위에서 반복될 것이다. 안수진의 (비트루비우스 인간)은 바로 이러한 지속적인 반복, 즉 이상적인 Automatlsm(자동운동)을 구현한 것이다 이 자동성은 인간이나 사회의 의지와는 별도로 초 자본화된 산업사회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것에 소외된 혹은 종속된 인간들의 운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4 _ 안수진의 인본주의: 기계와 실존의 조화 혹은 파행

안수진의 작품을 과거 미래주의나 다다이즘의 예술가들이 보았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찾았던 최적의 해법을 보지 않았을까? 그의 작품은 정교하게 고안된, 그렇지만 '비합리적인' 용도를 지닌 기계들이다 일정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지만 - 소위 작금에 많이 언급되는 '알고리즘' 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 어떠한 편익이나 공익을 위한 기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즉 무목적적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서 안수진의 작품은 기계가 아니라 반(rf)기계이며, 그 목적론에서 벗어나면서 예술작품이라는 다른 존재성을 얻는다

이렇게 고안된 기계는 현대의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이전 기계에 대한 찬미를 보냈던 미래주의자들부터 과학만능주의가 횡횡하는 현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기계나 과학문명에 대한 처절한 절규나 경고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형성한 사회구조를 은유하거나 메커니즘을 유사하게 재현하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을 부여하는 상징적인방식이다.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날개)에서는 금속 재질의 구조물 안에서 될 새 없이 날개 짓 하는 기구가 설치되어있다. 그러나 이 부단한 날개 짓은 구조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다 알베르 까뮈가 가장 실존적인 존재로 내세운 '시시포스' 는 바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끝없이 반복되는 시도를 하는 자다. 안수진의 작품은 까뮈가 그랬던 것처럼 기계화된 제도나 문명 속에서 판 박은 삶을 살아가는 개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인간이 욕망하는. 하지만 결코 실현되지 않을 궁극적인 의지를 기계의 메커니즘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안수진의 기계는 메커니즘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두 부분이 이질적으로 결합한 상태이며, 이것은 바로 그가 바라본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선택된 방식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처음에는 상징적으로 그러나 점차 서사적인 구조로 읽혀진다 이 모순 결합에 대하여 작가는 "이것의 부속품들은 1차적으로 기계에 국한되지만 그 선택은 내적인 삶의 조건들과 연결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감각 장치들과 인문사회학적 조건들을 나열하거나 이합, 집산하여 실제 삶이 사회적 제도로부터 보장받고 있는 안위와 이로서 얻게 될 지루한 반복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야기될 허무와 해방의지를 표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일상의 권력과 정치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안수진의 기계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기제나 장치처럼 인식된다. 다시 말해 '제도로서 구축된 감옥이 될 수 있다'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전 기계에 대해 찬미와 그것으로 인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모든 미래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이 낙천적인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안수진은 이제 미래의 과거를 보면서 회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들이 남기는 정서들은 그런식으로 대체로 시니컬하고 회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 속에는 자기를 포함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남아있다. 차갑고 냉정하고 또한 기하학적 구조미 속에서 유기체적인 따뜻함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그가 매우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인본주의적 예술가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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