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숭
움직임의 시학, 혹은 의식의 등가물(等價物)

안수진은 기계와 미술의 행복한 결합을 꿈꾸는 작가다. 그는 예술과 기계 사이에 존재해왔 던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비적대적 관계로, 나아가서 예술적 감수성의 발현을 기계적 움직임 을 통해 예술적 감수성의 발현을 보여주려는 작가다. 그래서 이 작가는 언제나 새로운 실험 을 획책해야만 하는 과학자의 성스러운 고뇌를 보여주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그는 패기 만만한 발명가의 야심찬 모험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기계나 도구에 대한 지식과 고도의 수공적 기술을 갖춘 끈기있는 장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그 로부터 어릿광대의 고달픈 숙명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돌발적인 행태를 통해 새 로운 '보는 재미'와 자극을 요구하는 관객의 욕망, 그것을 보듬지 않으면 안되는 어릿광대의 슬픈 운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일정한 기계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작업들이며, 그 기계적 움직임을 통해 어떤 일정한 서술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형성해왔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이룩한 그의 결실은 한국 현대미술의 궤적에서 결코 적지 않다. 재료, 빛, 그리고 움직임을 위한 시학 이라는 주제 하에 이루어진 작업을 통해 한국의 몇 안되는 키네틱 조각의 전형을 훌륭하게 보여준 결실 때문이다. 움직임이 미술의 영역에 열어놓은 그 무한한 가능성의 차원과, 그것이 작가의 예술적 의식을 반영하는 등가물로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전제에서 말이다.

실험적인 과학자나 야심만만한 발명가의 풍모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기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로 타이머가 동반된 전기모터에 의해 추진되는 여러 기계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반복적인 운동을 보고 즐길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작가의 일정한 의도에 의해 설계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력전달 장치 자체의 힘에 의해 생기는 우연한 돌발적인 운동감이 강조되기도 한다. 일단, 철판띠가 커다란 철제탑을 중심으로 우아한 곡선의 조합을 그려내는 〔야합의 띠〕가 전시장의 중앙에 위치한다. 거대한 철판띠가 크랭크의 추진작용과 기어의 맞물림을 통해 천천히 순환하며 움직이는 이 작품은, 구조를 통해 움직이는 질서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에 해당된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기계를 통한 인과관계를 명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작품은, 팽팽한 듯 하지만 실제로 느슨한 이완의 상태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은유로 생각할 수 있다
.
경우에 따라, 작가는 여전히 가시적인 조형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때도 있다. 〔위험한 사랑〕과 같은 작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낚시대에 연결된 모노필라멘트줄을 모터가 잡아당기는데, 이때 그 낚시대의 탄성 때문에 하트 모양이 벽면에 만들어진다. 그런가 하면, 〔끝없는 착각〕과 같이, 상어 지느러미를 머리에 지고 바닥에 놓여진 긴 철판띠가 모터의 작동에 따라 경련적인 파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 철판띠가 놓여진 쪽 벽면에는 낯선 연상을 통해 음험한 욕망을 자극하는 묘한 오브제가 벽면에 걸려있다. 이 작업에서 보여주는 파동은 일정 부분 계산된 것이며, 일부분은 계산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모터가 제공하는 물리적인 힘이 바닥의 긴 철판띠에 제공됨으로써, 이 작품은 파장이 시작에서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극적인 연쇄의 파장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연쇄현상은 공간적 지각과 함께 맞물린 시간적 지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내풍경〕에서처럼 탁자 위의 꽃병이 돌아 움직이며 벽면의 옷걸이에 걸린 옷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업이 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주변과 인간의 환경에 대한 감각적인 관찰의 결과로써 시적(詩的)인 풍경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현실과 관련된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작업이 있다. 들숨과 날숨을 쉬는 커다란 상어 지느러미를 배경으로, 앉음막에 사진을 담고 있는 그네가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그네와 상어〕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물체들이 조합되어 관람자의 낯선 심리적 연상작용이 요구된다. 만약 현실의 풍경 속에서 낯선 심리적 연상을 보려하지 않고, 실제적인 움직임과 그 결과에 따른 약동의 상징만을 보려고 한다면, 〔낯선 곳의 새〕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검은색 날개가 천천히 펼쳐지고 접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눈 아래 두는 새로운 비상을 꿈꿀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계미학의 가능성을 찾아서 키네틱 아트는 사실상 자연의 법칙을 인지하고, 주변의 다양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예술이 다. 그것은, 자연이란 결코 멈춰 서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 걸맞는 예술적 반응 을 가시화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자연에 대한 성찰을 인간 적 의식의 차원으로 전환시켜 놓은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기술적 창의성과 재능, 기술공 학에 대한 끈질긴 탐구심뿐만 아니라, 심미적 감각과 형태에 대한 직관력을 필요로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두루 겸비한 이 작가의 노력을 통해 '움직이는 미술'의 매력적인 방법론과 풍성한 흥분에 접할 수 있다. 키네틱 아트는 다른 분야의 미술에 비해 대단히 불리한 여건과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본원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아직 시도되지 않은 수많은 기술적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키네틱 아트란 아직껏 그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문턱에 서서, 그저 문이나 두드리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기계미학의 가능성을 검증해본 미술의 역사가 전혀 없는 우리의 실정을 감안할 때 말이다.

실험만으로 예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안수진이 획책하고 있는 실험들은 그 실험의 단계를 곧 극복하여 상당히 원숙한 기계미학으로 성장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작가의 현재의 작품만으로도 우리는 '움직이는 미술'의 매력적인 방법론과 풍요로운 흥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창의성과 재능은 현실의 열악한 조건에서도 빛난다. 조건과 환경이 성숙된다면 더욱 큰 가능성의 길이 열릴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가령 〔낯선 곳의 새〕라는 작품이 거대한 규모로 확장되어 야외의 공간에 놓여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한층 더 새로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접힌 날개가 탁 트인 공간 속에서 서서히 그 거대한 날개살을 펴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거대한 날개가 활짝 펼쳐져 무한한 하늘을 배경으로 공간을 점유할 때 볼 수 있는 그 위용과, 시간의 간격에 따라 조형의 전체성을 차츰 인지하게 만드는 형태의 척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글에서 나오면서
기계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경이로운 에너지의 원천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믿음직한 노예 처럼 주인이 스위치만 넣으면 지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그런 우직한 물체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것을 인간이 만들었듯이, 그것은 의외로 인간의 모습과 의식을 반영하 고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자연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기계가 그러하듯이, 기계를 활용하는 키네틱 아트도 예술적 진실을 담아내는 인간적인 활동의 영역에 속한다.
안수진이 기계의 움직임을 통해 일정한 물리적?심리적 현상을 탐구하는 그 모습이란, 사실상 인간의 조건과 자연의 차원에 한정 지워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계 미학이라는 메피스토페렐스와의 악마적 계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움직임의 시학을 들여다보고 즐길 수 있는 한, 우리는 대단히 행복한 관객이다. 아직은 상상하기 어려운 또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는 작가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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