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me
안수진 200년 9월 17일


작가의 작업은 ‘움직임을 통한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다루며 사고의 흐름을 형태화 시키는 키네틱 작업을 해왔다. 이번 작품전은 자의든 타의든 한정된 공간을 점유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사각형 또는 그 외 기타의 모습으로 규정 되는 일련에 극화된 공간 안에서 기계로 진화되는 삶의 허상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이번 작품들은 뒤샹의 /The Large Glass/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녹아내리는 사물’ 작품에서 발견되는 Frame 구조를 차용하여 시작되었다. 기계미학에 심취한 뒤샹의 작품 The Large Glass의 기계화된 전경(前景) 이면에 숨어있는 성적인 알레고리가 역설적이게도 기계의 윤활유 역할로 느껴졌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은 충만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더 불안과 공포로 녹아 흘러내리는 듯 했다.

특희 뒤샹의 이 작품은 20세기가 시작되던 즈음 만들어진 것으로 다차원적 공간이 열리는 과학적 성과에 자극받은 미술이 그 돌파구를 열었다고 본다면 100년이 지난 지금의 작가는 권력화 된 과학이 만든 기계화된 시니컬한 환상이 비속한 현실과 버무려지고 베이컨적으로 공포에 떨며 녹아 흐른 인간은 구조화된 체계 안에서 응고 되었다.

삶은 기계를 닮고자 한다.
기계를 닮고자 하는 삶의 의지는 사면을 경계하고 안과 밖의 세계로 확연히 구분되는 입체의 구조를 만든다 그 안에서 개인의 문화적 정체성은 홍위병 앞에 선 사람처럼 발설과 설득이 불가능 하다. 기계는 멍청하여 자신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하고 좌우를 구분하지도 못한다. 정연한 브라켓에 걸려있는 각각의 부속들은 그 미려한 공리성의 순열 속에서 자신의 주어진 순서를 가동하여 전망이 아름다운 운행을 한다. 각각의 디랙토리 같은 방안에서 무한 반복되는 비천한 움직임들은 무수히 많은 방들의 또 다른 움직임과는 하등 관계없는 무의미한 동작들이지만 메커니즘의 작동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최초 의도자의 이념을 구현한다. 상하 또는 전후로 연결된 단순한 매뉴얼의 명령체계는 통제할 수 없는 아득한 곳까지 연결된 신경망으로 안쪽 세계에서는 그저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닮고자 하는 삶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기계미학적인 모습은 도처에서 발견되는 지평으로 각자의 공간 안쪽의 시간성 마져 바꿔버린다, 이번작품들을 일종의 indicator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인디케이터는 기계를 위한 측정도구를 말하며 이것은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둘 간의 상황조건을 표준화 시키는 도구이다. 세상을 기호로 표시하는 인디케이터는 구체적이지만 이미 추상이기도 하다 , 현실적 조건들이 기호화 되는 작품은 구체적 추상화 이다. 그것은 삶의 지지멸렬함 속에 숨어있는 형이상학적인 힘들에 관해 이야기 하며 착각과 오해로 가득찬 세계를 측정 한다.

또한 판토마임 같은 풍자장치들은 세상을 일종에 ‘ 텍스트’로 상정하고 전시된 작품들은 텍스트 옆에 단정하게 자리한 범례 또는 색인처럼 구성함으로써 텍스트의 사실적 분위기와 그 조작가능성이 있는 사회지배 이데올로기를 은폐하는 장치로 순응에 대한 거부와 파편화된 삶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기계적 환상이 지배하는 곳에서 기계로 반성을 이끌어내고 궁국에 작가가 만든 기계들은 자체로 목적이 된 기계가 되는 것. 기능적 쓰임을 전제로 태어난 것들로 불용(不用)적 상황을 지향 하는 것으로 적어도 도구적 속성만을 제거 하더라도 미술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미술도 기계적 세계의 책략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형식을 바꾸어 지난 미술을 부정하는 예술의 죽음을 예고하여도 포괄적 미술관의 시스템은 모두를 상품화 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기계적 책략은 허여한 공간 너머를 봉쇄하는 텍스트화로 작가의 작업은 세계에 대한 상징적 참조(index)를 시도하며 더불어 참조 안에 또 다른 참조를 개입시켜 문학적 또는 미술적 상상으로 이미 삶 안에 화학적으로 용융되어 있는 기계적 이데올로기를 선별적으로 증거 하려 한다. 오래전 작가의 은사께서 “자네의 작품은 설치 미술이군”이라 하시기에 작가는 “아닙니다. 제 미술은 설비 미술입니다.” 하고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 말은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이다. 그것은 뒤샹이 열어놓은 레디메이드의 세계와는 조금 다른 세계로 사물의 도구성을 제거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도구성을 가감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작가가 구상한 기계가 작동되는 순간 그가 만든 기계는 그 어디에도 효용가치가 없는 자체로 목적화된 기계로 변하여 ‘집합되고 조립된 사물성’ 그리고 ‘기능 너머를 겨냥한 도구’ 사이에 존재한다. 에둘러 사물성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기계들은 그것들의 작동과 함께 세상을 담지 한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주 분주하다. 전혀 미술에서는 소용되지 않는 작가의 머릿속에만 로망처럼 존재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 전혀 낮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 물론 그들에게 작가는 단순한 구매자일 뿐이겠지만 오랜 작업시간 동안 퍽이나 친해지고 가까워진다.

그들과 만나면 작가는 일종의 공동 조력자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 기계에 대해 삶에 대해 교통하게 된다. 그들 중 미술인은 한명도 없다. 그들에게서 문화라는 말은 불편하다 .모두 그들이 처한 입장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옆에서 보기에 숙연하여 미술인이라는 명함은 한번도 내민 적이 없다. 약발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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