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ronome
조각가 안수진

우리는 장치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장치들은 학교일 수 있으며 직장이고 가정일 수 있다. 家系일 수 있으며 친구일 수 있고 불쑥 찾아온 낮선 방문객일 수 있다. 굳이 그것이 딱딱한 기계가 아니더라도 장치는 도처에 널려있다. 단적으로 이 사회에서 하나의 계약을 성사시키려 한다면 얼마나 많은 매뉴얼을 거쳐야 하는지 알 것이다. 씻줄과 낱줄의 정밀한 논리와 수순을 따라 가다보면 자신이 장치 안에 함몰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일 것이다. 체제의 생산물, 혹은 권력장치의 생산물은 주지하다시피 스스로 자유롭고 자율적인 판단능력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구조적 질서로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로 읽는다.

현대지식사회는 자신을 규정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구조적 과정을 의식하지 못하고 일종에 기만에 빠져있다. 이렇게 한 시대의 주체를 물품처럼 주조하는 것으로 현대 지식사회의 일단의 속성은 수구적 장치를 견인하는 힘이다. 살아 움직이는 장치, 흡기 할뿐 배기하지 않는 자폐적 장치, 자체의 메카니즘의 준거의 틀이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강박적인 장치 , 타켓이 공유 될 때는 얼켜 있는 네트워크로 서로의 위험을 보험 하는 엄청난 자력을 보이는 장치. 그곳에서 인간은 탈개인화 된다.

나는 지난 첫 개인전 도록에서 “사회는 엄정한 계약에 의한 결탁의 분위기에 쌓여 있다“ 고 했다. 친숙한 것은 그간 익숙해 진 것일 뿐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은 톡톡한 댓가를 사회는 요구한다. 얘기가 이쯤 되면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이 성향으로 보이겠지만 본인이 주목하는 것은 장치가 유기체처럼 진화 한다는 것으로 풀루서(Vilem Flusser)의 표현처럼 장치들의 위계는 상부로 한없이 열려있다는 것이며 장치의 내부를 알 수 없는 장치의 작동자-지배자-들도 역으로 장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세계를 주시하는 매개로 장치는 존재한다. 장치는 의도와 의미를 갖으며 전혀 무위적이지 않다. 상부로 열려 있는 장치는 배후에 권력과 횡포, 근거 없는 희망, 현재를 담보로 과거와 미래에 다리를 담그고 있는 기묘한 상황으로 그려진다. 장치는 거대 장치의 네트워크를 꿈꾸며 자체의 메카니즘의 생존번식만을 위한 욕망을 재생산한다. 장치 안에서 조차 반감과 순응 사이에 불안한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년간의 한국의 상황을 묘사한다. 본인이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독재의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민주화 시대가 구현 됐다고는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각종 고안된 장치들의 퇴행행위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역사는 그토록 부정하던 세계에 대한 거울 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염원하던 민주적 성취를 만들어내질 못하였다. 에너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택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각종 장치들의 커넥션을 묵도 하면서 해 본다. 역사의 연속성인가 장성한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이번 작업의 형식적 변화는 대칭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대질심문을 하듯 권력의 과거관과 미래관, 좌익과 우익, 386과 신세대, 개혁과 안정등 대칭적 세계를 한 장소에 정위시켜 자신을 분열한 장치와 그 속에서마저 타자화 되어가는 개인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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