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탁한 삶, 틈을 찾아서
// 김주현 ph.D , 예술철학, 이대 인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안수진의 4번째 개인전 Metronome에 명시된 ‘비디오와 키네틱 설치전’은 문자 그대로 만족할만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널찍한 전시실에 배치된 7개의 작품들은 그가 지난 15년간 천작해온 작업들에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그 정점과 경계에서 반성적 지평을 예고하고 있다.

안수진이 헌신하고 있는 작업들은 단지 산업화, 기계화된 사회의 익숙한 도구들을 이용한, 지극히 발빠르고 적당히 건조한 장치적 조작물로 규정될 수 없으며, 나아가 움직임의 조형성, 시지각과 변형이라는 표피적 개념들로도 축소될 수 없다. 위에서 ‘문자 그대로 만족할만한 성취’로 언급한 그의 작가 양식은 오히려 낡은 출처인 구성주의로 돌아가 근원적 성찰을 요구한다. 구성주의 원칙은 ‘추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은 감각을 압도할 역동적인 힘의 이미지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간, 속력, 리듬, 움직임으로 표상된 ‘정동(靜動)의 관계 구성(composition)’이 단지 형식적 충동, 추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구성주의는 전쟁과 세기말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야기한 자신감의 결핍과 정신적 불안에 기초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예술의 기능을 자연의 보완으로부터 미적, 물리적, 기능적 한계로 인도했다. 예를 들어 조각의 경우, 그것은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라 공간의 분산으로 나아갔다. 이제 기초적인 조형적 요소는 더 이상 물리적 덩어리가 아니라 동적인 리듬이 된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의 생명력 있는 이미지 구조를 창조’한다는 것은 단지 추상, 환영, 자율성의 미술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움 가보의 고백처럼 “삶에 대한 복잡한 인간관계를 포함한다.

그것은 생각과 행동, 이해와 삶의 형태이다. 삶을 고양시키고 가속화하면, 그것에 걸맞는 발전된 사물과 행위, 곧 예술이 건설되고 구축된다.”(Gabo: Constructions Sculpture Paintings Drawings engravings, London(Lund Humpries 1957: 171) 구성주의에 대한 성찰은 예술사가 예술가의 의식 속에 내재한 현실을 표현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안수진이 키네틱 조각의 전형을 만족스럽게 완수했다는 것은 새로운 이미지의 출현, 능숙한 기계 매체의 조작뿐만 아니라, 그가 직면하고 몰두하고 있는 시대, 삶의 내용에 있다. 그는 전작들에서 물질적으로 상징화된 움직임으로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질문해왔으며, 이번 전시에서 그것은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사적이고 공적인 역사, 사회적 장치와 시스템의 문제로 재구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6세대의 회한과 갈등은 향수에 찬 회고나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한다. 정련된 장치들은 낡고 거친 삶의 내용을 중화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무한히 소급되고 확장되는 세계, 곧 더 거대한 장치 속으로 빠져든다. 둔탁한 삶은 그 거대한 무게로 여전히 그곳에 서 있으며 점점 더 세련되고 강력하게 스스로를 증식하고 있다. 안수진은 예민하게 그 무게를 감지했으며 몇몇의 명랑한 장치와 날렵한 조작으로 간단히 감출 수 있는 만만한 허구가 아님을 폭로한다. 통제 불가능한 세계, 닫힘과 사로잡힘, 분열과 타자화는 전시장 위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반복하여 움직이는 장치들을 더욱 공허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진보'라는 거짓 이름 하에, 미성숙하고, 참담한 삶은 예술의 완벽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깔끔하고 세련된 포장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과도하다. 예술을 초과하는 삶의 공포, 거대한 권력, 강력한 지배는 예술을 제한한다. 안수진은 예술의 완벽함을 통해 오히려 예술을 압도하는 삶의 공포를 현시시켰고, 동시에 삶의 과도함을 넘어설 '직접적인' 책임이 예술만의 것은 아님을 가슴아프게 토로한다.

삶이 변하지 않는 한, 예술은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한갓 꿈으로 남은 예술은 그 자체로 소외일 뿐이다. 삶의 참담함과 예술의 완벽함, 삶과 예술의 삐걱거림, 그 갈등과 틈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안수진의 장치들이다. 그의 긴장, 분열, 고립은 갈등의 정점이면서 해결이 시작되는 경계선을 표지한다. 전시장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조롱에 찬 <용>보다도, 입구에 서면 전면에 보이는 지치고 무력한 <어느 회색 분자의 날개>보다도, 무심한 발장난이 끔찍한 고문과 살인에 이르는 <스테레오 수조>보다도, 그는 우선 고요한 <세월의 병풍>을 관람하게끔 배치했다. 5분여 동안 4개의 화면에 등장하는, 논리적이지도, 통합적이지도 않은 이미지들은 거대한 서사 구조를 포기하는 순간, 파편화된 삶, 끊임없이 변경되고 재구성되고 재의미화되는 삶이 주는 가능성과 위안을 상기시킨다. <슬립>에서 누군가에게는 몬드리안의 추상화로 보일 조그만 바둑판이 내공과 경지에 따라 승리와 해방의 메시지가 되듯이 말이다. 삶은 항상 통제할 수 없이 아득하게 서있지만 오히려 그 타자화의 경계선은 이쪽과 저쪽 모두를 열어젖히는 틈, 균열이 된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이다. 그것은 안수진이 정점과 경계에 서서 새로운 능선을 찾는 흥미로운 도전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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