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을 통한 알레고리적 소통-유쾌한 시각적 게임」 _박춘호(조각가)

“공간은 기계를 닮고자 한다. 기계는 멍청하여 자신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하고 좌우를 구분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정연한 브래킷에 걸려있는 각각의 부속들은 그 미려한 공리성의 순열 속에서 자신의 주어진 순서를 가동하여 전망이 아름다운 운행을 한다. … 이것을 닮고자 하는 공간/삶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안수진은 보기 드물게 Kinetic 조각에 몰두해 있는 작가다.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모터에 의한 단순한 회전운동이 기계적 장치와 그것을 제어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순서에 따라’ 관객들 앞에서 무한반복운동을 한다.

작동하는 기계장치 끝에는 작품제목과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어떤 형상이나 오브제가 첨가되어 있다. 그들은 멍청한 반복운동을 넘어 작품제목과 함께 추론해 볼 수 있는 어떤 의미 있는 행위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작품 감상에 시각적으로 방해가 되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움직임자체와 더불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작품을 위한 메커니즘과 알고리즘을 설계하기위해 낭만주의적 관점의 감성적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 공학적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멍청한 기계에게 미려한 공리성의 순열 속에서 자신의 주어진 순서를 가동하여 전망이 아름다운 운행을 하게 하는 작품”이 되게 한다.
그는 왜 움직임의 미학에 빠져든 것일까?

“작품이 작동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마력으로 다가왔다. 미래파, 구성주의, 다다로 이어지는 조각에 있어서 시간성의 문제와 테크놀로지의 천착은 있어 왔지만 내가 이를 주목한 것은 ‘서사’를 표현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이다.” 안수진이 ‘움직임’에 매료된 이유는 “서사를 표현하기 쉽다.”는 이유이다. 그의 작품에서 기계장치에 의한 움직임은 알고리즘에 따라 특정한 사이클을 무한 반복한다. 그 하나의 사이클에는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은 서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진이 움직이는 사진 Motion Picture, 즉 영화가 되어 시작과 끝이 존재하게 되면서 서사가 생산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서사에 관심을 갖은 이유를 추측해보기 위해 잠시 그가 조각을 공부하던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로 돌아가 보자.

1979년 ‘현실과 발언’ 동인전을 시작으로 당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권위주의적 정치현실과 급격한 산업화로 야기된 사회문제를 작품에서 다룬 민중미술운동이 전개됐다. 그들은 분단국가의 현실로 인해 우리사회에서 금기시되던 마르크시즘적 리얼리즘에 기초한 작업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서구적 모더니즘계보의 소그룹운동이 전개되었다. 소그룹운동 참여 작가들은 이전 모노크롬세대와 같이 관념적인 미학에 기초한 ‘서구미술과의 동시대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미술계 현장의 이와 같은 실태와는 무관하게 교육현장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이 우세하였다.

전통적 문인화로부터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주류를 이룬 모노크롬 그리고 1980년대 소그룹운동까지 한국 미술은 관념적인 미술이 주도해 왔다. 여러 시대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런 관념적 미술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것이 민중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미술이 ‘관념에서 구체적 삶’으로 일대 전환이었던 것이다. 그도 삶으로부터 유리된 관념적인 작업을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움직임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이후 급성장한 미술시장과 해외유학자유화 이후 첫 세대들의 귀국 후 그들의 활동은 한국미술계에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인 당시에 갓 귀국한 젊은 작가들은 작가지망생들에게 최신의 정보창고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전세대의 제한되고, 제 삼자를 거친 서구미술에 대한 정보가 거의 실시간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도입되기 시작했다. 미술계에 다양한 서유견문기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상대적으로 표절시비도 끊이지 않았다. 가장 뜨거웠던 사건은 1997년에 발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술시장의 성장은 자본에 의해 미술계의 중심축이 화랑으로 옮겨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술계의 동력이 이념에서 자본으로 급변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예가 1989년부터 이전의 ‘계간미술’이 ‘월간미술’로의 전환이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기에 학창시절을 보내고 작가로 데뷔한 그는 신진작가로서 그동안 미술교육의 보수성에 반하여 신선한 정보를 접하며 새로운 자신의 “서사를 표현하기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새로운 매체와 미학에 경도되었을 것이다.

이미지 생산기술의 발달로 미술에서 사용가능한 매체가 다양해 졌다. 새로운 매체는 이전 매체의 형식을 일정부분 참조하여 생산되고 평가받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미학을 갖추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영화는 말 그대로 움직임에 관한 단순한 녹화recording였다. 초기 러시아 영화와 같은 다양한 실험, 렌즈의 발전, 그리고 허리우드의 자본과의 결합을 통해 비로소 영화의 매체미학이 확립되었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조각에서 움직임에 관한 관심은 날로 높아졌으며 동력을 이용한 움직임은 Jean Tinguely의 Meta-metics로 부터 최근의 Rebecca Horn의 작업까지, Kinetic art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다양한 첨단 기술들과 결합하면서 자신만의 미학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이런 선상에서 안수진의 작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언어의 조형화, 시사적 개념의 차용, 물질과 그 움직임의 분석적 접근, 의미전달을 하는 sign으로서 동력의 사용은 실제적 움직임의 물질적 연상(Allegory)으로 작업의 흐름을 유도하는 일련의 시나리오( Algorithm)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기계적 알고리즘과 문학적 알레고리는 일정한 문맥의 성격을 띠며 이는 잘 제어된 작품의 내적, 외적 구성의 풍경으로 협소한 심미적 기계미학으로 함몰될 위험성으로부터 작업을 보다 자유롭게 열어놓게 된다. 이로써 나의 작업은 ‘장치’로서의 모습을 전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움직임의 미학에 경도된 안수진의 작업은 기존의 정적인 조각 작품에서는 볼 수없는 ‘움직임에서 기인하는 신기함’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의 작품은 기계의 작동을 통해, 또한 노출된 메커니즘을 통해 진부하거나 혹은 너무 심각하고 예민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한 편의 유머와 같이 풀어나가고 있다. 가끔 그의 작품은 과도한 “심미적 기계미학”에 대한 집착으로 진부함과 신선함 사이의 경계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움직임의 기계미학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 움직임의 처음과 끝의 존재로 인해 생성되는 서사, 즉 이야기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작품에 담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는 자신의 삶의 터전인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자신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고민들이다. ‘소설적 진지함을 만화적 가벼움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작가 안수진의 특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의 작업들을 그가 사용한 어휘를 조합해 문장으로 만들어보면 ‘기계적 알고리즘을 통한 알레고리적 소통행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은 시각적 매체를 통한 관객과 작가의 소통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문자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미술작품은 애매하고도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1839년 다게르의 사진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이후 20세기 서양미술은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능중의 하나였던 기록기능을 상실하면서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때 미술이 철학이 되기를 원했었던 적도 있었다. 산업사회에서 이제 회화와 조각은 대량소비구조에 적합한 매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기술복제시대에 원본성에 기초한 현재의 미술은 소수 mania들만의 (?) 것으로 소통의 장이기보다는 투자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움직이는 알레고리적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지금, 여기’에서의 실존적 고뇌를 관객과 더불어 마치 해석의 유희와 같은 시각적 게임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Duchamp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자. “The spectator is part of the eternal creative process of change and chance." Duchamp은 미술의 장에서 관객역할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작가다. 이제 미술은 작품이라는 것을 매개로 작가와 관객사이의 끊임없는 창조적 소통행위로 정의내릴 수 있다. 언어적 소통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작품의 명제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각 이미지를 어떤 구체적 상황에 고정시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작품의 명제는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소통의 단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안수진의 작품은 표제성이 강하다. 그러한 그의 작품에서 작품명제와 함께 알고리즘에 의해 정해진 사이클을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움직임의 알레고리는 무엇일까? 그와 더불어 어느 것에선가 차용을 한 작품은 관객에게 차용된 원 소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는 차용한 것으로부터, 알레고리로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기계적 장치들과 그것에 의해 구동되는 구체적 형상 혹은 오브제들이 보여주는 반복된 행위는 작품의 명제와 함께 관객은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을 해석하며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그의 알레고리적 작품은 관객이 표제와 작품의 움직임간의 다양한 조합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며 의미를 찾아나가는 유쾌한 스무고개와 같은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절대로 스쳐 지나가게 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주제가 "Frame"이라고 했다. 첫 번째로 인용한 작가노트에서 말한 것과 같이 “… 이것을 닮고자 하는 공간/삶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어떤 “공포”일까? 추측 건데 어떤 알고리즘으로 짜여 진 ‘지금, 이곳’-아마도 구조화된 사회-에서 살아가야 되는 작가의 삶에 대한 고뇌가 이번 전시의 화두인 것 같다. 한국사회는 지난 반세기동안 세계 최빈국중 하나에서 G20에 참가하는 주요 경제국가중 하나로 발전하였다. 아마 이것만큼 우리에게 식상한 이야기는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의 짧은 시간동안 산업화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는 재구조화 되었고, IMF사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 완전히 전환되면서 구조적으로 사회적 계층의 변동이 불가능한 고착화 된 사회-20대 80의 사회-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재고해봐야 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는 한국사회는 개인에게 자본의 논리에 의한 알고리즘에 맞춘 개인의 삶을 더욱 더 교묘하고도 정교하게 강요하고 있다. 그러한 자본의 논리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판단기준이 되어 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게 미술시장의 규모와 활황정도가 국가적 문화수준의 Barometer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혹시 이러한 상황들을 그는 “공포”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공포를 그는 알레고리적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면도사는 모니터속의 길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가죽 띠에 면도칼을 갈고 있다. 예전 이발소에서 눈감고 면도를 받을 때 날 선 칼에 자신의 턱밑 목을 내 맡기고 스팀 타월로 모근까지 보일만큼 이완된 상태에서 칼날과 피부의 마찰의 느낌은 면도사의 미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섬뜩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불이 꺼져있는 건물 안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절전을 위해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에 의해 작동하는 불들이 마치 누군가 위층에서 건물 출구 쪽으로 급박하게 이동하는 것과 같이 불들이 점멸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그 건물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 같다. 날개가 퍼덕거리고 있다. 웅비를 위한 날갯짓인지 아니면 그저 퍼덕거림인지는 알 수 없다. 왜? 날개만이 보일뿐이기 때문이다. 일차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한 반복운동을 하고 있는 오브제 일뿐이지만 그 단순한 반복운동들은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움직임의 미학이 아직도 짧은 역사로 나름대로의 미학을 찾아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전시에 대한 그의 단상을 들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Kinetic Art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다시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Emerging Artist에서 어느새 중년에 들어선 작가가 원점으로 회귀하여 자신의 작업과 움직임의 미학에 대해 다시 성찰해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속도와 민첩함이 날로 중요해지고, ‘베버의 법칙’과 같이 과도한 자극에 점점 익숙해져 감각은 무뎌지고, 대량소비사회의 꽃인 광고의 홍수 속에서 조장되어진 획일화된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서 자신과 주변의 삶을 성찰하며 현재의 좌표에 대한 확인과정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절대적으로 유의미한 것이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과 선택을 위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그가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는 서예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서예에 정진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조선의 선비들에게 서화는 수양의 한 방편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작업이 ‘지금, 여기’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론적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자신의 내적수양에 정진하겠다는 것인가? 앞으로의 고민이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진지한 시대정신의 고찰’과 ‘미술에 대한 열려있는 자세’가 잘 어우러져 지금까지의 고단함을 떨쳐버리고 더욱 더 좋은 작업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앞으로의 그의 작업이 지금의 움직임의 미학에서 어떤 변화를 추구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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