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 허상, 소외 그리고 신체와 운동의 변증법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

치욕, 허상, 소외/

안수진은 자신의 정체를 '혓바늘'로 함축한다. 돗은 혓바늘의 그 깔깔함, 식욕의 상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 그것은 내가 읽은 바에 의하자면 안수진의 작가의식이기도 하다. 작품<치욕, 허상, 소외>는 우리에게 그 단서를 제공한다.

치욕/

안수진은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거듭 밝히면서, 자신이 형식과 질료와의 순수 한(?)싸움에서 어떻게 지쳤던가를 회고한다.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때 내가 이해했던 그의 심정은 90년대 초반에 쓰여진 그의 한 싯구로 함축될 수 있을 것이다.

"틑어진 누런 벽지 속 / 명태의 괭한 눈을 보면서/ 이제는 아무 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 나는/(...)/쑤셔 넣은 치욕이/(...)/ 비대해질 때/(...)/ 증명할 수 없는/알리바이가 지긋이/ 힘을 쓰며 / 잠행할 것을 요구한다."

한 때 정말 힘을 발휘했었던 철학이자 강령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작가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영혼을 강화하고, 어떠한 고독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력을 스스로 숙성시켜야 한다. 인습으로부터의 해방과 독창성에만 부름 받기 위해, 그리고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지식만을 따르기 위해 오로지 고독과 친숙해져야만 한다. (안수진이 현재의 치욕과 상반되게 환기하는 80년대의 분위기는 나의 기억으로는 대략 이러한 선동들이 먹혀 들어가는 어떤 것이었다. 불안하더라도, 작가는 오로지 자신만을 주장하고, 자신의 법칙에 따라서만 창조하는 예술가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작가는 오로지 자신의 개성의 견고함 속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적어도)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부심과 반항과 고독에 기초한 작가의 기반은 상실 된지 오래다. 90년대는 작가에게 투쟁과 이탈이 아니라 용이 주도한 침묵을 권장한다. 자신을 팔고 작업을 지속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인가? 예술행정과 그 숱한 예술애호 단체들의 수혜자로 남기 위해, 그리고 정부의 '눈부신(?)'지원 하에 있기 위해, 이제 작가는 그 단체와 기관들의 눈에 들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공식적인 명성을 가져야만 하며, 깍듯한 예의범절을 갖추고, 신중하고 사려 깊게 발언하고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당시 쓰여진 다른 글에서 작가는 '숨길수롤 드러나는 치욕'의 한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 "나 역시, 이 같이 익명적인 세계에서 미력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가 엄중 한 계약에 의한 결탁의 분위기에 쌓여있음을 말한다."

허상/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는 자유와 시민정신의 승리가 아니라, 가공할 공포와 탄압, 억지합의와 표리부동을 조장해왔다.
마르크시즘의 유토피아는 억압과 소외와 빈곤의 추악함 으로 종결됐고, 러시아의 유혈혁명은 훨씬 더 혹독한 억압체제만을 반복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슈퍼 301조와 IMF의 , 구토를 일으키는 자명함으로 드러났다.(...매사가 이런 식이다.)
아도르노와 마르쿠제의 고급문화는 그들이 혐오했던 '마비된 비판기능', 즉 '문화산업'으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단절을 선언했던 예술은 '세계를 잇는 가교' 로서 정치가들의 웅변으로 되돌아오고, 부르조아 리얼리즘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자는 시인과 화가들의 전위는'은행가의 제도' 가 되어 되돌아오고 있다. 모든 약속과 예언과 선언들은 그 신뢰를 상실했다. "인간성자체가 확실성의 종말(the end of certitude)에 도달했다."고 일리아 프리고진이 투덜댄다.

소외/

그러므로 , 안수진은 이와 같은 세상에 속한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희망한다.


기계, 신체의 모더니즘/

미적 모더니즘의 기본을 질서에 대한 분노(rage against order)로 간 주했던 다니엘 벨을 따르자면, 안수진은 모더니스트다. 오해가 없도록 하자, 작가의 분노가 단지 부르조아를 놀래키거나 당대의 주류 양식에 도전하는 따위로 독해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작가'의 모던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포스트모던'과 상반된 태도에 의해 읽혀져야 할텐데, 이를테면, 포스트모던인은 분노하지도 않고, 양순할 뿐인 자신의 삶으로부터 치욕을 느끼지 도 않는 것이다. 기꺼이 파우스트를 비웃고,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안수진의 세계를 모던으로 구분하는 또 다른 근거가 없지 않은데, 이를 밝히려면 우선 그의 세계를 일반화된 키네틱의 범주로 국한하려는 표피적인 시도에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운동이 자족의 충분조건이 아니며, 운동만큼이나 그것을 실현시키는 기제,(결코 부대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닌) 메탈의 신체와 그 조형적 구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환기되어야 한다. 신체 즉 조각의 존재기반이 여전히 긍정되고 있다는 사실, 그의 세계는 부단히 운동하지만, 운동을 다를수록 역설적이게도 명증해지는 쪽은 조각적 자각이다. 부피도, 무게도, 냄새도 없는 운동이 그의 조각적 자각, 기계적 신체 위에서 더 역력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언젠가 안수진은 자신의 작업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돈이 있으 면 조금은 덜 때워도 될 일이지만). 그렇다, 동시대의 점점 더 많은 작가들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는 몸으로 '역의 실존'을 입증해 가고 있다. 역의 실존! 하긴, 3차원 동영상과 가상 현실의 시대에 기계미학 자체가 이미 한물 간 언어가 아니던가? 기계는 그 문명이 발인한 비극들로 후기산업사회의 저변에 깔린 피해의식의 골간이 아니던가?

퇴행적 시대인식, 혹은 자신의 역류적 자각, 기계와 그를 기반 삼는, 무엇보다 우선 신체로의 역행이야말로 안수진 의 정체감이다. 이 부담스러운 신체에 의해 그의 운동은 더 혓바늘이 돗고, '껄끄러우며'. 더 '낑낑거리고', 덜 개념인, 비로소 안수진의 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의 운동이 팅겔리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팅겔리의 운동은 낄낄거리거나 엉엉 울지만, 안수진의 그것은 외마디 비명을 내뱉는다. 칼더의 운동은 낙관적으로 너울거리지만 안수진의 그것은 비관적인 역사를 어렵사리 기어오른다.
레베카 혼의 그것은 경쾌하게 조롱하지만 안수진의 것은 묵직한 세계에 여전히 볼모로 잡혀있다.

기계 + 시학/

그렇더라도, 안수진의 신체성이 질료주의와 혼돈될 염려는 없다.
여기서 질료 (기계)는 소비되는 대신, 의미의 생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운동의 입증이 아니라, 그것의 시종을 자신과 세계의 인식에 고리 지우는 것이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견, 확신에 차 서 강철과 기계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수진에게 기계는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활용 될 뿐이다. 그렇다면 , 무엇을 위해?

나는 언젠가 가차없이 회의에 부쳐지고 있는 기계 덩어리에 결백한 시학을 덮어씌우는 부적절해 보이는 봉합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기계의 준엄한 메카니즘에 기반을 둔 작품이 어떻게 '시'라는 낭만주의적 혈통에 스스로 입적시킬 수 있는가를 물었다.)

당시, 그 질문은 의심이 아니라 어떤 확인에 동기를 두고 있었다. 역설과 역행에 자주 기대는 그의 방식에 동의하는 나의 방식이었다고 해도 좋다. 최대한의 긴장을 견디다 반대쪽으로 튕겨 나가는 탄소강의 무력한자들의 그 출구 없는 분노를 담는 안수진의 방식, 그것으로부터 나는 자신의 자폭하는 기계를 통해 20세기의 레퀘엠을 유비해 냈던 팅겔리의 비관주의만큼이나 탁월한 한 실존주의적 고백을 읽는다.
마치 수용소 안에서의 샤르트르의 고백과도 같은, 같은 맥락에서, 무력감과 분노의 알레고리는 반향 없이 허공을 가를 뿐인<파리채>에서도 읽혀진다. (이에 관해서 라면, 나는 흔들의자의 양옆으로 약 220센티미터의 노가 공허한 타원운동을 되풀이하는, 그의 94년 작 <그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역시 흔들의자의 안락함은 갑자기 고독으로 둔갑하고, 노젖기가 활발해질수록 한 발자국도 진행할 수 없는 절망의 골만이 깊어 질 뿐입니다. 우리는 기계로 구성된 작가의 둔탁하고 공허한 운동 앞에서 기호로 쓴 시 이상의 텍스트를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 육중함을 한 구절의 싯구에 예속된 그 육중함의 대비, 무쇠와 톱니바퀴와 탄소강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문학적 전용, 그 자체가 시학이다.
여기에는 역설과 반어와 함축이 있고, 메타포와 알레고리가 작용하고 있다.
<자벌레>에서 역사는 한낱 곤충의 꿈틀거림으로 치환되고 그 반복이 성실할수록 이상하리 만치 묵시록적이다. <안전지대>의, 자신을 숨기면서 진행되는 상대방의 주시에는 왜소하고 비굴해진 존재에 관한 냉혹한 성찰이 관여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경의>: 그날/이후/ 사라진... 그러나 그날은 한 회전 후에 종소리를 신 호로 정확하게 현재로 귀환한다. (여기서는 결코 그 어느 것도 추방시키지 않으려는 태도가 역설적으로 강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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